만 40세 최고령 사이클링 히트 기록과 최고령 타격왕에 빛나는 트윈스의 적토마 2005·2013 이병규
한국 프로야구 야신의 후예들 역대 타격왕
이병규는 장충고등학교 시절에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모교인 장충고등학교가 워낙 약체라 전국대회에서 번번히 고배를 마셨기 때문에 동기인 신일고등학교의 강혁과는 다르게 상대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진 편이었습니다. 당시 LG 트윈스에서 꾸준히 영입을 시도했지만 단국대로 진학했으며 고교 시절과는 다르게 당시 단국대는 대학야구 강호였고,아마 최다 타점 기록인 한 경기 11타점까지 기록하는 등 대학 야구 최고의 타자로 떠오르며 아마야구에서 이름을 떨쳤습니다.당연히 대학 최고의 타자였던 이병규를 두고 서울 연고 구단이던 LG 트윈스와 OB베어스가 서로 이병규를 1차 지명으로 뽑겠다고 선언하였고, LG가 주사위 싸움에서 OB를 이기자 주저없이 이병규에게 1차 지명권을 썼고,결국 1년 전 박재홍이 현대 유니콘스와 계약할 때 받았던 신인 야수 최대 계약금(4억 3천만원)보다 1천만원 더 많은 4억 4천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합니다.
데뷔 시즌인 1997년에 5번 타자로 활약하며 .305의 타율로 신인왕과 골든글러브를 획득한 이병규는 2019년 시즌까지 LG가 배출한 마지막 신인왕이었습니다. 1998년은 약간의 2년차 징크스를 겪으며 .279의 타율에 그쳤으나, 방콕 아시안 게임 드림팀으로 참가하여 병역을 면제받았으며 3년차인 1999년에 기량이 만개하여, 30홈런 - 30도루라는 괴물 같은 성적을 내며 30-30클럽에 가입합니다.데뷔 이후 첫 두 자릿수 홈런 시즌을 30홈런으로 장식하며 장타율 또한 무려 2할이나 상승했지만 다만 이 1999년이 역대 최악의 타고투저 시기였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는 있습니다. 1999년에만 30-30 가입자가 이병규, 제이 데이비스,홍현우 등 3명이나 되었고, 홈런으로만 한정해도 양준혁,심정수,마해영 등이 30개 이상을 쏘아올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시즌 이병규의 WAR은 KBO 단일 시즌 중견수 WAR 2위로 같은 잠실을 홈으로 쓰는 거포 우즈, 김동주, 심정수의 홈런 개수도 각각 34개, 22개, 31개 였다는 걸 생각하면 거포보다는 교타자에 가까운 이병규가 잠실을 홈으로 30-30을 기록한 것이 대단한것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의 타고투저 시즌이 있었으나 잠실을 홈으로 쓰는 선수 중 30-30을 달성한 선수는 현재까지도 이병규가 유일합니다.게다가 기록한 타점 수가 99타점으로 100타점을 넘겼더라면 3할-30홈런-100타점도 달성할 수 있었으니 역대급 시즌이라 할 수 있습니다.이후로도 두 자릿수 홈런에 60~70타점 이상을 칠 수 있는 타격으로 꾸준히 활약했지만 도루의 경우 크게 감소하는 양상이었는데 2002년부터 겨우 8~10개를 왔다갔다 하다가 2006년에는 겨우 3개를 기록할 정도 급격히 감소해 버렸습니다. 도루 감소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히 2003년 시즌 도중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당해 발이 예전만 못해진 게 그 원인으로 볼넷:삼진 비율도 계속 나빠져서 2004년 50 : 72, 2005년 34 : 62, 06년 31 : 65. 일본 진출 후엔 슬러거도 아니면서 삼진이 100개를 넘어갔습니다. 한편 꾸준히 국가대표로도 활약하기도 했는데, 특히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야구 동메달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 예선 일본전에서 9회 끝내기 상황에서 나온 안타를 잡아 홈으로 쇄도하던 2루 주자를 보살시키던 장면은 아직도 회자될 정도의 명장면이기도 합니다.
이병규는 프로 10년차인 2006년 시즌이 끝나고 FA 자격을 얻자 일본으로 진출, 주니치 드래곤즈와 3년 계약을 맺습니다. 사실 이병규의 일본리그 진출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는 과연 갈 수 있겠느냐고 의심하는 견해가 많았는데, 직전 시즌 성적이 상대적으로 평범했던데다 이병규의 스타일 자체가 외국인 타자에게 기대하는 슬러거 유형도 아니었기 때문인데 주니치 쪽에서 이병규를 원했던 이유가 있었는데, 2007 시즌을 마치고 FA가 되는 팀의 간판타자인 후쿠도메 고스케가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한 상태라 외야에 공백이 생길 것이 예정된 상태였기에 중장거리 타자이고 운동 능력이 뛰어난 타입이라는 점에서 두 선수가 비슷한 유형이기 때문에 대체 선수로서의 매력이 있고, 적응기간 1년 뒤에는 후쿠도메의 자리를 메꿀 수 있을 정도의 성적을 낼 것이라고 예상한 것입니다.첫 시즌인 2007년에는 후쿠도메 고스케,타이론 우증에 이은 5번 타순에 배치되었는데, 초반에는 3할 이상의 타율을 유지하며 문제없이 일본 무대에 연착륙하는 듯 했으나 서서히 약점이 노출되면서 결국 .262 .295 .370 9홈런 46타점 WAR 0.4, wRC+78 이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으로 정규시즌을 마쳤습니다. 특히 이 해에 기록한 108개의 삼진은 이병규의 커리어 역사상 유일한 세자릿수 삼진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 37타수 6안타로 영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6안타 중에 5개가 장타였고 3홈런에 11타점이 있었으며 일본시리즈에서는 이 타점들이 영양가 만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주니치가 훗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를 꺾고 일본시리즈를 우승하며 개인 통산 첫번째 우승을 맛보게 됩니다. 코나미컵에도 출전했지만 SK 와이번츠를 상대로 4타수 무안타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는데 팬들은 이를 두고 조국(한국팀)의 승리를 위해 개인의 성적을 내팽겨친 열사라고 칭하며 '라면병규 + 열사'를 합쳐 '라열사'라고 불렸으나, 정작 이병규는 결승전에서 구원으로 올라온 김광현을 상대로 쐐기투런포를 때려내 주니치에 승리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코나미컵이 주니치의 우승에 기여합니다.
후쿠도메가 시카고 컵스로 떠난 2008년에는 이전 시즌보다 훨씬 많은 16개의 홈런과 65타점을 기록했지만, .254 .293 .416의 슬래시 라인은 여전히 낙제점이었고, 세부 스탯도 WAR 0.4, wRC+ 94로 좋지 못했으며 수비 역시 필딩율 .983, FS -4.4, rRng -3.5로 작년에 비해서 현격히 떨어진 모습을 보였습니다.3년차인 2009년엔 별다른 부상이 없음에도 계속 2군에 상주하다가 1군에 올라와 단 3경기만을 뛰고 다시 2군으로 내려갔으며 이후 주니치 외야의 공백이 생기면 1군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2군으로 떨어지는 것을 반복하다 시즌을 마쳤습니다. 시즌 종료 후 09년 성적은 타율.217(101타수 22안타) 8타점 3홈런 으로 FA 먹튀 확정,계약 만료 후 이병규 본인은 재계약을 원했으나 구단에서는 가차없이 거부했고 그렇게 이병규는 주니치를 떠나게 됩니다.일본에서의 통산 기록은 3년 동안 타율 0.254에 28홈런 97득점 119타점 OPS.676 WAR 0.5. wRC+ 84,이병규는 한국에서도 볼넷을 많이 얻는 유형이 아니었지만, 일본에선 그 정도가 더 심해져 51볼넷 234삼진으로 삼진이 볼넷의 거의 5배에 달했으며 통산 출루율은 3할도 되지 않는 0.290로 1000타석 이상의 외국인 선수 중 역대 최저 출루율이란 불명예스러운 기록까지 세웠습니다.이병규가 일본 무대에서 성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나왔는데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배드볼 히터인 이병규의 스타일 자체가 철저하게 약점을 파고들며 유인구 위주의 승부를 하는 일본 야구의 트렌드와 상극이었다는 의견도 있으나, 결국 이병규의 최대 무기였던 컨택 능력이 상위 리그인 NPB에서 쉽게 통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많습니다.이러한 이유로 이병규가 팀에서 뛸 당시 주니치 팬들의 여론은 당연히 좋지 못했는데 마쓰이 히데키가 양키즈에 입단할 당시 받은 금액과 필적하는 계약으로 데려온 선수였고, 중계권료는 전경기 출장시 3000만엔 정도로 연봉의 상당 부분을 한국 방송사가 책임진 이승엽과는 경우가 달랐던 데다가 입단 당시 주니치 계열의 일본 언론이 한국의 이치로라고 선전을 하면서 기대치가 너무 높아져 있었는데다 주니치의 이전 외국인 선수였던 알렉스 오초아에 비해 공수 양면에서 너무나 떨어진 모습을 보인지라 그와 비교되어 폭풍처럼 까였으며, 일본 웹에서는 '칠 수 없고, 지킬 수 없고, 달릴 수 없는' 선수라는 평가를 내린 것이 돌아다녔습니다. 다만 포스트시즌에서 임팩트 있는 활약이 있었고, 팀에는 잘 융화했다는 점, 퇴단한 이후에도 이대호가 일본 진출할 당시에 해 준 조언 등이 번역되어 알려지면서 일본 야구를 존중하는 자세가 재평가되어 야구는 못했지만 성격은 좋았던 선수 정도의 평가로 정리되었습니다.
재계약에 실패한 이병규는 2010년 1월 8일, 원 소속팀인 LG 트윈스와 2년간 연봉 4억원 + 계약금 1억원에 계약을 체결,일단 외야 포지션은 박용택 - 이대형 - 이진영으로 주전만으로도 포화 상태인데다가 '유망주를 잘 발굴해보겠다'는 박종훈 감독의 발언과 히어로즈에서 38억원과 2군 선수 2명을 내주고 이택근까지 데려오는 바람에 그가 설 자리는 매우 좁았는데 이 해 박용택이 전업 지명타자로 전환하며 좌택근 중대형 우진영으로 가려다 이택근을 1루로 돌리고 좌대형 혹은 좌병규에 중병규,우진영으로 고정시켰으나 이번엔 이진영이 커리어 로우를 찍으며 결과적으로 의도하지도 않았음에도 원치 않은 교통정리가 이뤄지고 말았습니다.결국 페이스를 그냥저냥 유지하며 부상 시즌을 제외하면 커리어 로우 수준의 성적인 0.290, 9홈런, 64타점, 3도루의 최종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2012 시즌 이병규는 한일통산 2,000안타 달성하며 시즌 최종 성적 타율 0.300, 출루율 0.333, 장타율 0.400 41타점 52득점 5홈런으로 마감했습니다. 타격 생산력은 장타율이 겨우 4할에 턱걸이하는 등 (OPS형 타자가 드문 크보의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심각하게 저하되었지만 불혹이 눈앞인데 3할 타율을 기록합니다.2014 시즌의 이병규는 어느덧 우리 나이로 40세에 진입했고 시즌 초에 햄스트링 부상으로 약간의 공백기를 가졌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최고령 사이클링 히트 기록과 최고령 타격왕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함을 과시했습니다.
2014 시즌 만 40세가 된 이병규는 지난 시즌 부상 때문에 미뤄진 2000안타에 도전했고 5월 6일 한화와의 경기에서 윤규진을 상대로 역대 4번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지만 본격적인 에이징커브가 이 해부터 시작되었고 팀내 입지도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2015 시즌 최종성적은 53경기 92타수, 타율 .217, 20안타 1홈런. 그야말로 폭망하였는데 14년에도 기대 이하였지만 15년의 성적은 종전보다 훨씬 기대 이하의 성적을 기록하였고 대부분의 팬들은 나이는 속일 수 없다는 평가였습니다.2016 시즌 단 1경기에만 출전한 이병규는 은퇴를 선언했고 KBO 리그 17년 동안 1740경기 출장 통산 타율 0.311/2,043 안타/371 2루타/38 3루타/161 홈런/972타점/995득점/147도루/장타율 0.452/장타율 0.365를 기록합니다.이병규는 2005년 0.337로 첫 타격왕을 차지한 후 8년후인 2013년에 0.348로 두번째 타격왕을 차지하지만 이병규는 안타제조기라고 할만큼 안타 생산력이 매우 높았는데 17시즌 동안 총 4번의 최다안타를 기록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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