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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전설스토리 타격의 신神 타이콥-위대한 10년과 일그러진 야구 영웅을 향한 가짜 뉴스들과 오해들

사포니즘 2023. 3. 25.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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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10년과 일그러진 야구 영웅을 향한 가짜 뉴스들과 오해들/

메이저리그 전설스토리 타격의 신神 타이콥


타이 콥 Tyrus Raymond "Ty" Cobb: 타이러스 레이몬드 "타이" 코브(1886년 12월 18일~1961년 7월 17일)


이 콥 Tyrus Raymond "Ty" Cobb:타이러스 레이몬드 "타이" 코브(1886년 12월 18일~1961년 7월 17일), 통산 타율 0.367를 기록한 전설적인 메이저리그 타격의 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The Georgia Peach 더 조지아 피치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타이 콥은 24년간의 메이저리그 선수 시절 중 22시즌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보냈으며 우리나라 원년 프로야구의 백인천처럼 선수 겸 감독으로 마지막 6시즌을 보내기도 했으며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기도 합니다.일단 타이 콥의 말도 안 되는 위대한 기록들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냉정하며고 알려진 타이 콥의 수많은 이미지가 상당 부분 왜곡되고 일그러진 소문과 가십의 결과물이라면 수긍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소문에 아니 땐 굴뚝에 불이 나겠냐고 하지만 그런 일들이 현대 사회에서는 가짜 뉴스라는 ㅇ름으로 떠놀기도 합니다.타이 콥과 포수 폴 크리첼의 악명 높은 홈플레이트 슬라이딩 장면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타이 콥이 동료의식도 없는, 자신의 기록만을 위해 잔혹한 슬라이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타이 콥의 잔혹한 슬라이딩의 당사자 폴 크리첼은 1957년  스포팅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진실을 말합니다.

 

"오해를 불러일으키게끔 찍힌 사진입니다. 충돌이 있었고 다툼 끝에 둘 다 벌금을 물어야 했지만 콥은 제 다리를 찍지 않았습니다글러브에 든 공을 쳐 떨어뜨리려고 했죠. 그리고 저 충돌에 제 책임이 없다고 할 순 없겠네요.(it was really my fault) 홈 플레이트 앞을 막아서고 있었으니까요. 또한 콥이 상대를 다치게 할 목적으로 경로를 벗어나 슬라이딩을 한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베이스를 터치하게 위해 돌진할 분이거든요. 만약 당신이 콥의 주루 경로에 끼어들었다면, 그건 당신의 불운이라고 봐야겠죠. 또 당신이 공을 갖고 있다면 콥은 애꿎은 곳이 아니라 그 공을 떨어뜨릴 목적으로 미트를 치려할 겁니다. 그런 방식을 비판할 순 없다고 봅니다. 특히 당신이 콥처럼 승리를 갈망하는 선수라면요."

타이 콥의 악명 높은 슬라이딩 사진과 포수 폴 크리첼(Paul Krichell)

메이저리그 경기 방식은 시대를 거듭하며 룰이 개정되고 업그레이드되어 왔으며 적어도 잔혹한 슬라이딩이라며 비난받았던 타이 콥의 슬라이딩 방식을 당시 당사자는 정당한 게임의 룰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이브 루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데드볼 시대에 있어 가장 위대한 타자로 추앙받았던 타이 콥이기 때문에 당시 메이저리그를 취재하던 기자들(우리는 일명 기레기라고 부릅니다)에 의해 악의적인 방식으로 타이 콥의 이미지는 왜곡되고 그릇된 악명 높은 야구 선수의 이미지로 대표되었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각도에서 본 타이콥의 슬라이딩은 악의적인 날아차기 슬라이딩이 아닌 일반적 슬라이딩이라고 할 수있다

인성이 개쓰레기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타이 콥이지만 야구 실력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월등했던 그는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는 24년간 데뷔해 만을 제외하면 은퇴하는 순간까지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하고 통산 타율 0.367의 기록으로 은퇴합니다. 우리나라 프로야구에서 타격하면 빼놓을 수 없는 양준혁은 배트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이라고 했지만 9년 연속 3할 타율에 그쳤으며 타격의 달인 장효조는 늦은 나이에 데뷔하여 비교적 짧은 10년간의 프로생활 동안 통산 타율 0.331의 기록을 남깁니다. 비교 대상이 좀 빈약하다고 하실 분들을 위해 일본 프로야구의 천재 스즈키 이치로가 일본에서 9년간 남긴 타율이 0.353입니다. 이치로의 기록 자체도 넘사벽인데 타이 콥은 그야말로 외계인의 성적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물론 타격으로 치면 아메리칸리그 좌타자에는 타이 콥,내셔널리그 우타자로는 로저스 혼스비(통산 타율 0.358 기록)라고 할 정도이지만 타이 콥의 야구는 베이브 루스가 홈런으로 야구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이전까지 치고 달리고 훔치는, 야구의 정석을 모두 실천할 수 있었던 최고의 선수가 바로 타이 콥이 하고 할 수 있습니다.우리나라로 치면 이종범의 업그레이드 버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타이 콥이 은퇴할 무렵에 타이 콥이 가지고 있던 야구 기록은 90여 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대충 타이 콥의 타격 기록만 살펴봐도 통산 타율 0.367, 통산 출루율 0.433, 장타율 0.512,경기 출장수 3.034게임, 4.191안타, 117홈런,1.938타점과 2246득점, 897도루와 1249볼넷을 기록하며 범접할 수 없는 기록을 남겨둡니다. 타이 콥의 불멸의 기록으로는 역시 통산 타율 0.367릉 들 수 있습니다. 이후로 테드 윌리엄스의 0.344의 기록과 장타력을 포기한 토니 그윈의 0.338가 메이저리그의 최고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등장한 일본의 스즈키 이치로는 노쇠화로 인해 통산 타율이 떨어지고 있는 실정이고 보면 21세기에도 타이 콥의 통산 타율은 불멸의 기록으로 남을 확률이 높습니다.4.191개의 안타를 때려낸 통산 안타는 57년 만에 4.256개의 안타를 날린 피트 로즈에 의해 경신되고 2246개의 통산득점기록은 핸더슨이 73년 만에 깨버립니다. 하지만 타이 콥 은퇴 9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타이 콥은 통산 안타와 득점, 3루타에서 2위를 기록하고 있으며(이치로의 기록은 제외) 출루에서 3위 2루타와 도루에서는 4위, 총 루타에서 5위 등을 마크하고 있는 그야말로 시대를 뛰어넘는 야구의 레전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좌익수 수비를 맡던 타이콥은 수비에서도 최고의 선수였다

▧타이콥의 잔혹한 스파이크 징과 인종차별에 대한 단상

타이 콥을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뛰어난 타자가 아닌 야구 선수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뛰어난 중견수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동시대 선수인 회색 독수리 트리스 스피커는 2루 베이스 바로 뒤에 둥지를 틀고 수많은 안타를 잡아냈는데, 통산 449개를 기록한 스피커 다음으로 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한 선수는 바로 타이 콥(392)이었습니다. 타이 콥은 데뷔 첫 세 시즌을 제외하고는 은퇴할 때까지 거의 중견수로 뛰다가 은퇴하였습니다.타이 콥은 통산 892개의 도루를 기록할 만큼 빠른 발과 함께 천재적인 판단력과 결단력으로 상대 수비의 허점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던 주자였습니다.타이 콥을 2루 도루를 시도하면서 자신이 완벽한 스타트를 끊었다고 생각하면 2루에서 슬라이딩을 하지 않고 아예 3루까지 내달렸다고 합니다. 외야플라이 때 2루에서 홈으로, 단타에 1루에서 홈까지 내달린 장면 등은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전설이기도 합니다. 타이 콥의 한 시즌 96도루와 통산 892도루는 1947년과 49년 후에 경신되지만 타이 콥이 세운 기록 중 불멸의 통산 타율 0.367와 함께  절대로 깨어지지 않을 불멸의 기록이 바로 54개의 홈스틸입니다.역대 2위 맥스 커레이(33)보다 21개가 더 많은 기록이기도 합니다. 타이 콥의 경이적인 홈스틸 기록 때문인지 타이 콥을 잔인하고 무서운 주자로 각인시킨 것은 상대 팀 선수들이 보는 앞에서 스파이크 날을 날카롭게 갈고 높이 쳐들고 슬라이딩을 했다고 하며 미처 피하지 못한 야수들은 처참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보다 먼저 살해 협박을 받은 이가  타이콥이라고 하는 이야기들, 진실일까? 거짓된 가짜 뉴스일까?하지만 이에 대한 前 메이저리그 유격수이자 명예의 전당 헌액자 조 팅커(Joe Tinker)의 인터뷰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흔히 알려진 내용과 달리, 콥은 장난으로라도 스파이크를 가는 시늉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크게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에게 들러붙은 그러한 종류의 이미지를 불명예스러워했고 오히려 리그 국장이던 벤 존슨(Ban Johnson)에게 날이 뭉툭한 스파이크를 도입하고 심판들에게 검사를 받게 해야 한다는 건의 서신을 보낸 일도 있었습니다.또한 타이 콥은 편히 앉아서 상대의 고통을 즐기는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결코 몸을 사리는 법이 없던 그는 누구보다도 고통을 잘 이해하던 선수였습니다.

이와 함께 타이 콥이 1958년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내용은 결코 타이 콥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무자비하고 동료의식이 없는 그런 선수가 아니라는 것을 유추하게 합니다.

이 자국들은 엘리베이터나 난간을 타면서 생긴 게 아닙니다.
다리에 생긴 흉터들을 보이면서 씨익 웃으며 타이콥은 말했다.
주루 선상의 공포라고 불리기도 합니다만,
사실 상대 선수들이 그냥 무서워하기만 했던 건 아니었죠.

콥이 가장 인정한 타자 조 잭슨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 찍힌 타이 콥의 관한 탐구

 

메이저리그의 대표적인 인종차별주의자로 알려진 타이 콥,알려진 사실들이 타이 콥을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로 지목하고 있는데 조지아주 출신인 타이콥은 유색인종은 물론 북부 출신 선수들조차 싫어했으며 당시 타이 콥의 디트로이트는 아일랜드계와 독일계 북부 선수들이 유난히 많아 잘 지내기 힘든 환경이었으며 여러 차례 흑인을 폭행하고 물의를 빚는 등 타이 콥이 인종차별주의자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의 대부분은 타이 콥이 19세기 말 조지아에서 태어났으며 또 흑인과 관련된 웃지 못할 사건과 폭행에 많이 연루됐다는 점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일단 타이 콥의 출생지인 남부 조지아주 혹은 타이 콥이 자라온 환경을 살펴본다면, 의외의 사실과 마주치게 되는데 타이 콥의 증조부 알프레드 콥 William Alfred Cobb은 노스캐롤라이나에 살던 감리교 목사였는데다 그는 인디언과 백인을 한데 모아놓고 동등하게 설교를 베푸는 것도 모자라 대놓고 노예 제도를 비판하던 인물로 결국 가족들은 이로 인해 살던 곳에서 쫓겨나 상대적으로 노예의 필요성이 덜한 마을로 이사하는 일을 겪기도 했다고 합니다. 타이 콥의 조부 존 프랭클린 콥 John Franklin Cobb 역시 노예제도를 반대하던 공화주의자로 지혜로운 풍모를 풍기던 마을의 존경받는 현인 같은 사람이었다고 전해지며 비록 자신은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책을 통한 배움을 몹시 중시하여 아들 넷과 딸 둘 전부를 잠깐이라도 좋으니 고등교육을 받게끔 했다고 합니다. 또한 타이 콥의 아버지 윌리엄 허셜 콥 William Herschel Cobb은 주 상원을 지내기도 한 교육자였는데 그의 연설, 저술, 관련인들의 발언들을 종합해볼 경우, 그 역시 할아버지, 아버지와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노예 제도를 인류의 실패라 말한 연설, 마을 흑인들에게 교수형을 가하려던 마을 사람들의 주장을 논파해 해산시킨 일화와 지역 저소득 흑인 계층에 대한 교육적 지원을 철폐하려는 의원의 법안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저지한 일 등 타이 콥의 가계 자체가 흑인들에 대해 어떠한 가치관을 지녔는지 알 수 있습니다. 타이 콥 자체가 야구장이나 밖에서 다혈질 성격으로 인해 분쟁거리는 분명 있었겠지만 19세기 조지아주 출신이라는 이유와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타이 콥을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로 매도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입니다. 타이 콥에 대해 알려진 인종차별주의적 일화의 상당 부분은 대중들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각색되고 새롭게 창조된, 이런 추측이 전혀 무리가 없는 것은 현재 역시 그러한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아니면 말고 식의 기사가 판을 치지만 한번 프레임이 잡히면 죽을 때까지 주홍글씨처럼 따라붙기 때문인데 타이 콥 역시 그런 기레기 기사의 피해자라는 생각입니다. 타이 콥의 헨리 번지 커밍스(Henry “Bungy” Cummings라는 이름의 흑인 구장 관리인과 그 아내를 폭행했다는 일화의 진실 혹은 거짓은!정황상 그런 일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을 공산이 크다는 것입니다.당시 기자들이 목격한 타이콥과 커밍스의 접촉은, 술에 취한 커밍스가 타이 콥의 게 "안녕, 캐리!(Hello, Carrie!)"라고 소리치더니(무슨 의미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내 타이 콥을 끌어안으려 했고 타이 콥은 그걸 밀치고 자리를 떠난 게 전부인 상황이었지만 이후 타이 콥이 당시 그를 폭행하고 그의 아내의 목을 졸랐다는 내용으로 와전되는데 이 내용은 바로 타이 콥의 팀 동료였던 찰리 슈미트 Charlie Schmidt에게서 나온 말로 의심스러운 것은 당시 데뷔한지 몇 년 되지 않은 타이 콥은 그 시기 고참들의 집요한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이들 중 하나가 바로 슈미트였는데(갑작스레 튀어나와 콥을 괴롭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나이 어린 타이 콥의 대한 집중적인 루키 헤이징은 당시 감독이었던 휴이 제닝스Hughie Jennings가 인정한 공공연한 내용이었는데 타이 콥을 모함해 팀에서 쫓아내려고 작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폭행에 대한 소송이나 커밍스 본인을 포함해 슈미트의 이 진술을 뒷받침할만한 또 다른 증언을 남긴 사람도 없이 소문만 무한 확대 재생산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타이 콥의 클리블랜드 호텔 살인사건의 경우 타이 콥이 살해했다는 경비원은 보통 흑인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살인사건이라는 중대한 범죄행위에 대해 아무런 확인도 거치지 않은 내용을 확대 재생산했을 뿐 아니라 당시 사회적 분위기 자체가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자세한 확인도 없이 흑인으로 몰아세우는 일이 잦았다고 합니다. 찰스 리어슨이 조사한 인적 사항 기록에 따르면 클리블랜드 호텔 살인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전부 백인이었으며 더군다나 살해는커녕 싸움 끝에 제압돼 녹다운 당한 쪽은 타이 콥이 있다고 합니다.즉, 단순 폭행 사건이었지만 타이콥은 흑인을 살해한 잔혹무도한 야구 선수로 갈기 갈기 찢긴 상태였다는 것입니다.(물론 싸움에 책임이 있던 타이 콥을 법정에서 단순 폭행 죄를 선고받고 벌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아내를 모욕했다며 식료품집 주인과 싸운 일화에서도 상대 백인 남성은 어느 순간 흑인으로 둔갑돼 있었을 만큼 흑인을 모든 불화나 사건에 연류 시키는 경향이 당시 사회적 분위기였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실제로 타이콥은 집안 내력에서 알 수 있듯이 어렸을 때부터 흑인 및 유색 인종 사람들과 함께 생활해오는 면 익숙한 편이었고 스스로도 자신은 흑인들과 함께하는데 있어 거부감은커녕 친숙함을 느낀다고 말한 바 있으며 어린 시절 흑인 소년들과 같이 놀며 자랐다고 합니다.당시 메이저리그에서는 어린 흑인 소년 등을 행운의 부적 겸 심부른꾼으로 데리고 다녔는데(당시 메이저리그에서는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다른 메이저리거들이 소년을 물건 다루듯 할 때도 타이 콥만은보호자처럼 챙겨주던 몇 안되는 메이저리거들 중 한 명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니그로리그 플레이어들과도 친분이 깊었으며 디트로이트 스타즈 소속 바비 로빈슨 Bobby Robinson은 타이콥과 대화를 나눌 때 어떤 편견도 느끼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다고 합니다. 또한 타이 콥의 흑인 고용인이었던 알렉스 리버스는 이후 콥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자기 자식의 이름에 "타이(Ty)"란 이름을 넣기도 했다고 합니다.물론 이러한 일화와 사례들이 타이 콥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만 역으로 생각하면 타이 콥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증거 역시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타이 콥 자신이 다혈질인 관계로 메이저리거 시절 시빗거리와 구설수에 상당수 오르내렸고 다툼 속에 백인들은 물론 흑인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결국 경우의 수였을 뿐이며 그것만 가지고 타이 콥을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할만한 근거는 없다는 것입니다.타이 콥의 입을 통해 인종과 관련한 공식적인 발언의 경우에도 그 어떤 멸시의 감정도 찾아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 대한 호의와 인종 문제에 대한 성숙한 의식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쩌면 타이 콥을 지독한 옐로 저널리즘에 찢기고 상처받은, 야구 하나만을 바보처럼 좋아하던 선수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 듭니다. 현재에도 야구만을 바라보며 뛰는 선수들이 자극적인 기사 한 줄에 상처받고 인격 살해당하는 것을 종종 보고는 하는데 1910년대에는 더하면 더했으리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 모든 글은 참조의 의미만 있습니다. 결국 판단은 여러분의 몫이라 여겨집니다.

 

단언컨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유색 인종 선수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함에도,
우리가 그들을 배척해야 할 이유가 제겐 전혀 떠오르지 않는군요.
덧붙여, 그 어떤 백인 선수도 유색 인종 선수보다 비신사적으로 행동해도 될 권리는 없으며,
또 제가 보기에 이것은 야구계에 한정되는 말이 아니라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야구계의 인종 통합에 대한 의견을 질문받은 후 타이 콥 Ty Cobb의 대답 중

세기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와 세기의 타격왕 타이콥

타이 콥의 위대한 시즌 24년 그리고 더욱 위대한 10년의 타이 콥

 

타이콥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유니폼을 입고 1905년 만 19세의 나이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합니다.천하의 타이 콥도 데뷔 시즌은 어려웠던 것일까, 41경기 출장에 타율 0.240, 출루율 0.288, 장타율 0.300, OPS : 0.588, 164타석 150타수, 36안타, 2루타 6개, 3루타 0개, 1홈런, 총 루타수 45, 15 타점, 19 득점, 10볼넷, 2도루의 성적을 냅니다. 하지만 타이 콥의 메이저리그 데뷔 3주 전에 끔찍하게 불행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도리어 이런 성적 자체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십 대의 나이였던 타이 콥을 생각하면 말입니다.비극은 바로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는데 어머니가 아버지를 총으로 쏘아 죽인 것이었습니다.(어떤 사람은 아내의 부정을 눈치챈 타이 콥의 아버지가 현장을 급습하려다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콥의 아버지를 강도로 오인한 콥의 어머니가 우발적으로 죽인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무엇이 진실이든 간에 아버지를 유난히 좋아했던 타이콥은 비탄에 잠기었고 어머니와는 의절하게 되며 이후 타이콥은 오로지 야구에만 저렴하게 됩니다. 이후 타이콥은 메이저리그에서 전무후무한 23년 연속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하는데 그 첫 시작은 1906년도였습니다. 총 98경기 출장한 1906년도의 타이콥은 394타석 358타수 113안타 타율 0.316, 출루율 0.355, 장타율 0.394, OPS : 0.749를 기록했으며 2루타 15개, 3루타 5개, 1홈런, 총 루타수 141, 34 타점 45 득점. 19개 볼넷과 몸에 맞은 공 3개, 23도루를 기록합니다. 첫 3할을 기록한 이후 타이콥의 질주는 시작되는데 1907년도의 타이콥은 타율, 장타율, OPS, 최다 안타, 최다 루타, 최다 타점, 최다 도루 기록 등 무려 7관왕을 이룩합니다. 1907년도의 타이 콥의 성적을 들여다보면, 150경기 출장 642타석 605타수 212안타 타율 0.350, 출루율 0.380, 장타율 0.468, OPS : 0.848에 2루타 28개, 3루타 14개, 5홈런, 총 루타수 283, 119 타점. 97 득점  24개 볼넷 및 몸에 맞은 공 5개, 53도루를 기록하는데 이때부터 소속 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는 1909년까지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지만 우승에는 모두 실패하고 3번의 월드 시리즈를 경험한 타이 콥의 포스트시즌은 이후에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타이 콥의 1907년 월드 시리즈 상대는 시카고 컵스였으며 5경기에 출장 21타석 20타수 4안타 타율 0.200, 출루율 0.238, 장타율 0.300, OPS : 0.538및 2루타 0개, 3루타 1개, 0홈런, 총 루타수 6, 타점은 없고 1득점, 몸에 맞은 공 1개, 0도루(도루 실패 1번)를 기록하며 아쉬운 한 해를 마감합니다.1908년의 타이 콥을 150경기 출장 635타석 581타수 188안타 타율 0.324, 출루율 0.367, 장타율 0.475, OPS : 0.842 및 2루타 36개, 3루타 20개, 4홈런, 총 루타수 276, 108 타점 88 득점 34 볼넷 및 몸에 맞은 공 6개, 39도루를 기록하며 타율, 장타율, OPS, 최다 안타, 최다 2루타, 최다 3루타, 최다 루타, 최다 타점 등 8개 부문에 자신의 이름을 맨 위에 올려 놓습니다. 1908년 역시 월드 시리즈에서 시카고 컵스를 만난 타이콥은 5경기 출장 21타석 19타수 7안타 타율 0.368, 출루율 0.400, 장타율 0.421, OPS : 0.821 및 2루타 1개, 3루타 0개, 0홈런, 총 루타수 8, 4타점 3 득점 및 볼넷 1개  2도루를 기록하며 선전하지만 팀은 다시 우승에 실패합니다.그리고 역사적인 타격 8관왕을 기록한 1909년도의 타이 콥은 총 156경기 출장 651타석 573타수 216안타 타율 0.377 출루율 0.431, 장타율 0.517, OPS : 0.947, 2루타 33개, 3루타 10개, 9홈런, 총 루타수 296, 107 타점 116 득점 볼넷 48개, 몸에 맞은 공 6개, 76도루를 기록하며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최다 안타, 홈런, 최다 루타, 최다 타점, 득점, 최다 도루 등 타격의 전 부분을 모두 석권합니다.그리고 1909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맞붙어 총 7경기 출장 29타석 26타수 6안타 타율 0.231 출루율 0.310, 장타율 0.346, OPS 0.656 2루타 3개, 3루타 0개, 0홈런, 총 루타수 9, 5타점 및 3득점  볼넷 2개와 2도루를 기록하며 타이 콥의 포스트시즌은 막을 내립니다.

메이저리그는 소위 데드볼 시대와 라이브볼 시대로 나뉘는데 데드볼 시대의 아이콘은 당연히 타격의 신 타이콥이며 1920년 양키즈로 이적한 베이브 루스가 54개의 홈런을 달성하며 본격적인 라이브로 볼 시대의 서막을 열기까지 1910년대부터 타이콥은 리그를 완벽하게 지배합니다. Cobb`s Decade로 불리는 타이콥의 10년, 그 경이로웠던 타이콥의 10년을 살펴보자면, 총 1334경기 출장 5791타석 5034타수 1948안타 타율 0.387 출루율 0.457 장타율 0.541, OPS : 0.998 및 2루타 313개, 3루타 161개, 47홈런, 총 루타수 2724, 828타점 1051 득점 볼넷 602개, 몸에 맞은 공 46개, 576도루를 기록합니다. 10년의 이 기간 동안 타이 콥은 MVP 1(1911)와 8번의 수위타자, 6번의 최고 출루율, 5번의 최고 장타율 및 장타율 6 1 기록, 6번의 최고 OPS 및 OPS 10 5 기록최다 안타 5, 200안타 5최다 2루타 2최다 3루타 3최다 총 루타 3, 300루타 3최다 타점 1번, 최다 득점 4최다 타수 1최다 도루 4번 등 리그를 완벽히 지배하였으며 1910년부터 1915년 까지 6년 연속 타격 1위(1907년도부터 9연속 타격 1위)에 올랐으며 1917년부터 1919년 가지 다시 3년 연속 수위타자에 오르는 등 메이저리그 24년간 총 12번의 타격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합니다.(단, 1910년의 타격왕은 몇십 년 후, 타이콥에서 냅 라조이로 바뀌게 되는데 지금도 타이 콥의 명예의 전당 동판에는 콥의 수위타자 수상 수가 12번이라고 기록되어있으며 통산 안타수 역시 기존의 4.189개와 이후 누락된 2개가 발견되어 4.191개로 표기되기도 합니다)

메이저리그의 외로운 늑대 타이콥의 24년 통산성적

 

타이콥은 1911년 총 146경기 출장 654타석 591타수 248안타 타율 0.420, 출루율 0.467, 장타율 0.621, OPS : 1.088 및 2루타 47개, 3루타 24개, 8홈런, 총 루타수 367, 127타점 147득점 볼넷 44개, 몸에 맞은 공 8개, 83도루를 마크하며 타율, 장타율,OPS, 최다 안타, 최다 2루타, 최다 3루타, 최다 루타, 최다 타점, 최다 득점 및 최다 도루에서 1위를 기록하고 타이 콥이 기록한 3번의 4할 타율 중 첫 번째를 이해 기록합니다. 1912년에는 140경기 출장 609타석 553타수 226안타 타율 0.409, 출루율 0.456, 장타율 0.584, OPS : 1.040 및 2루타 30개, 3루타 23개, 7홈런, 총 루타수 323, 83타점 및 120득점 볼넷 43개, 몸에 맞은 공 5개, 61도루를 기록,최고 타율과 장타율, OPS, 최다 안타 기록에서 최고를 달리는데 2년 연속 200안타 및 4할 타율을 기록하기도 합니다.1913년 타이콥은 122경기 출장 501타석 428타수 167안타 타율 0.390, 출루율 0.467, 장타율 0.535, OPS : 1.002 및 2루타 18개, 3루타 16개, 4홈런, 총 루타수 229, 67타점, 70득점, 볼넷 58개, 몸에 맞은 공 4개, 51도루로 타율과 출루율에서 1위 기록, 1914년 98경기 출장 414타석 345타수 127안타 타율 0.368, 출루율 0.466, 장타율 0.513, OPS : 0.979 및 2루타 22개, 3루타 11개, 2홈런, 총 루타수 177, 57 타점 69득점 볼넷 57개, 몸에 맞은 공 6개, 35도루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1위 기록, 1915년 156경기 출장 700타석 563타수 208안타 타율 0.369, 출루율 0.486, 장타율 0.487, OPS : 0.973, 2루타 31개, 3루타 13개, 3홈런, 총 루타수 274, 99타점 144득점 볼넷 118개, 몸에 맞은 공 10개, 96도루로 타율, 출루율, OPS, 최다 안타, 최다 루타, 최다 타점, 최다 도루 1위 기록함,1916년의 타이 콥 145경기 출장 타석 542타수 201안타 타율 0.371, 출루율 0.452, 장타율 0.371,  0.452,  0.493, OPS : 0.944 및  2루타 31개, 3루타 10개, 5홈런, 총 루타수 267, 68타점 113 득점 볼넷 78개, 몸에 맞은 공 2개, 68도루로 최다 득점과 최다 도루 1위 기록, 1917년의 타이 콥은 총 152경기 출장 669타석 588타수 225안타 타율 0.383, 출루율 0.444, 장타율 0.570, OPS : 1.014 및  2루타 44개, 3루타 24개, 6홈런, 총 루타수 335, 102타점 107득점 볼넷 61개, 몸에 맞은 공 4개, 55도루로 최다 타수, 최고 타율, 최고 출루율, 최고 장타율, 최고 OPS, 최다 안타, 최다 2루타, 최다 3루타, 최다 루타, 최다 도루 기록 수위 기록,1918년 111경기 출장 473타석 421타수 161안타 타율 0.382, 출루율 0.440, 장타율 0.515, OPS : 0.955 및 2루타 19, 3루타 14, 3홈런 루타수 217, 64타점 83득점 볼넷 41몸에 맞은  2, 34도루로 최고 타율최고 출루율최다 3루타 1위 기록.


1919년도의 타이 콥 성적은 124경기 출장, 타율 0.384, 출루율 0.429, 장타율 0.515, OPS : 0.944, 545타석 497타수, 191안타, 2루타 36개, 3루타 13개, 1홈런, 총 루타수 256, 70타점, 92득점, 볼넷 38개, 몸에 맞은 공 1개, 28도루로 타율과 최다안타에서 1위 기록, 1920년대 112경기 출장한 타이콥은 495타석 428타수 143안타 타율 0.334 출루율 0.416, 장타율 0.451, OPS : 0.867, 2루타 28개, 3루타 8개, 2홈런, 총 루타수 193, 63타점 86득점 볼넷 58개, 몸에 맞은 공 2개, 15도루를 기록 1910년대와 1920년대를 관통하는 메이저리그의 아이콘으로 전설적인 기록을 함께 남깁니다. 1921년부터 타이콥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선수와 감독을 겸했는데 감독을 함께 했지만 타이콥은 언제나 최고였습니다.비록 1920년대 이후 라이브볼 시대가 열려 스포트라이트는 홈런왕 베이브 루스에게만 쏟아졌지만 타이콥은 늘 꾸준했으며 1922년에는 선수 생활 중 3번째이자 마지막으로 4할 타를 기록하기도 합니다. 이후 1928년 은퇴까지 8년간 타이콥은 993경기 출장, 3.705타수 1.333안타 타율 0.360, 2루타 228개 3루타 61개, 홈런 48개, 113도루 등을 기록하고 은퇴하게 됩니다. 비록 세상은 베이브 루스의 홈런쇼에 열광했지만 타이콥은 자신만의 야구를 펼쳤으며 메이저리그에서 총 24년을 활동하며 불멸에 가까운 기록들을 만들어 냅니다. 총 3034경기 출장 13.068타석 11.434타수 4.191안타 통산 타율  0.367, 출루율 0.433, 장타율 0.512, OPS : 0.945, 2루타 724개, 3루타 295개, 117홈런, 총 루타수 5854, 1938 타점, 2246득점, 볼넷 1249개, 몸에 맞은 공 94개, 897도루와 함께 수비도 일품이었던 타이콥은 총 2954경기 출장하여 6507자살, 410보살, 278실책, 113병살처리, 수비율 0.961를 기록합니다. 타이 콥은 그 외에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한 팀에서만 22년간을 뛰며 3900개의 안타를 기록하여 한 팀 최다안타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54번의 홈스틸(2위 맥스 커레이 33개)과 아메리칸리그 기준으로 발로 만드는 홈런 인사이드 파크 홈런 46개로 최다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타이콥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똑딱이의 범주에 드는 타자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야구 자체가 홈런보다는 안타를 치고 도루를 하여 득점하는 방식이 일반적인 야구의 스타일이었고 루스 등장 이전까지 이런 방식에서 최고 중의 최고는 바로 타이콥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홈런을 제외한다고 해도 타이콥은 늘 두 자릿수의 2루타(3번의 최다 2루타 기록 세움)와 17번이나 3루타를 10개 이상 때려내며 장타율 1위를 기록한 시즌만 8번이나 되었으며 선수 생활의 막바지인 1925년경에는 베이브 루스에게 쏟아지는 환호와 더불어 어떤 기자가 루스의 타격을 칭찬하자 작심한 듯 그날 벌어진 경기에서 홈런 3개를 날렸으며 다음날 역시 2개의 홈런을 날리며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홈런은 언제든지 날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타이 콥은 상당히 부드러운 타격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콥-와그너 그립으로 불리는 방망이 쥐는 법을 개발했는데 콥 - 와그너 그립은 방망이를 쥐는 두 손의 거리를 10cm 정도 두는 방법으로 극단적으로 맞추는 것에 중점을 둔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 현대에까지 영향을 미친 중심이동 타법 역시 타이 콥이 쓰던 타격 기술이었습니다.타이콥은 원래 오른손잡이였는데 어릴 적 본능적으로 왼쪽 타석에서 치는 것이 1루에 도달하는 시간이 가깝다는 것을 알고 좌타석에서 타격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파란만장한 메이저리그 24년의 선수 생활을 마감한 타이콥은 1936년 첫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타이 콥 본인과 함께 최초의 5인 후보에 오른 월터 존슨, 크리스티 매튜슨, 베이브 루스, 호너스 와그너등 쟁쟁한 전설들을 물리치고 226명의 투표인단에게 단 4표의 반대표만 받으며 최고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게 됩니다.선수 생활 자체가 성공적이었던 타이콥은 이후의 사회생활 역시 성공가도를 달리는데 선수 시절 껌과 여성용 속옷사업을 하며 상당한 돈을 벌었던 타이콥은 은퇴 이후에도 주식과 부동산 투자 등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으며 사회사업 역시 활발하게 하여 애틀랜타에 병원을 짓는 등 좋은 일들을 많이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61년 타이 콥이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조문에 온 야구인은 단 3명이었다고 하는데 그만큼 타이 콥이 야구인들에게 신망을 잃었다고 할 때 그의 장례식에 참가한 야구인의 숫자를 언급하기도 합니다. 타이 콥이 사망할 당시 야구로부터 손을 덴지 33년이 흐른 후였고 장례식 자체가 가족장이었기 때문에 가까운 지인만 초대한 조촐한 장례식이었으며 3명의 야구인이 타이콥고 알던 사이였다고 합니다. 타이 콥이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성격이라면 사회사업 자체를 했을까 싶은 생각이며 설령 타이 콥이 지독히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성격이었다 하더라도 살인 슬라이등이나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악성 루머 자체가 타이 콥을 더욱더 언론과 거리를 두게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자신은 거리를 두지만 워낙 뛰어난 야구 실력 탓에 끊임없이 루머는 재생산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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